그렇다고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, 결국엔 패배하여 쓰러질 것이다.
그것만은 싫다. 이 싸움은 내가 나 자신에게 나는 걸림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내가 자처한 싸움이다.
그런 싸움에서 이렇게 무력하게 쓰러지긴 싫었다.
이기고 싶어.
방랑객에게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이긴 싫어.
내가 걸림돌이라는 것을 나 스스로 인정하긴 싫어...!
죄송해요, 할아버지. 이런 방법이 옳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...... 그래도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것 보다는......!
"혼부「유명의 고륜」!"
나는 품 안에서 스펠카드와 약병을 동시에 꺼내든 뒤, 스펠카드를 먼저 발동시켰다.
이 탄막을 막아내며 약을 마시기란 불가능하다. 누군가가 나를 엄호해 준다면 또 모를까.
그래서 나는 나의 반쪽-반령에게 엄호를 맡기기로 했다.
방금 전 발동시킨 스펠은 반령을 나와 같은 모습으로 현계시키는 스펠이다. 이거라면 약을 마실 수 있는 찰나의 시간은 벌 수 있겠지. 현계한 반령은 아무런 의문도 가지지 않고 내 주변의 탄막을 막아내기 시작했다.
반령 또한 나 자신이니 내가 생각한 것 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. 그렇기에 별다른 말 없이도 내가 의도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거겠지.
나는 마음속으로 반령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.
쓰디쓴 냄새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, 뚜껑이 열린 약병에서는 기묘한 향이 풍겨 나왔다.
뭐랄까, 쓰다기보다는 시면서 달콤할 것 같은 향이 난달까?
나는 잠시 약병을 응시한 뒤, 두 눈을 꼭 감고 약병 안의 내용물을 입 안에 쏟아넣었다.
직후, 갑자기 이성이 터져나가듯 사라졌다.
*
끈질기네... 이제 포기할 만도 한데 아직도 버티고 있다니...
도데체 뭐 때문에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? 이해할 수가 없네.
설마 아직까지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건가? 그것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버티고 있는 거야?
정말 그렇다면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네. 무심코 존경해버릴 것만 같아.
하지만, 지금은 아니지.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,
"산부「진실의 달(인비지블 풀 문」!"
조금이라도 빨리 정원사를 꺾어서 고통의 시간을 줄여주는 것 뿐.
스펠카드를 두 장이나 썼으니 이제 곧 결판이 날 거야. 이제 변수는 사라졌으니 모두 사부의 계획대로 될-
쿠콰콰콰콰콰-!
"무, 무슨-?!"
갑자기 나를 향해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다.
탄막 너머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폭풍은 내가 펼친 탄막을 모조리 날려버렸고, 그 거친 기세에 나는 하마터면 나의 탄막과
함께 날려가 땅에 내동댕이쳐질 뻔 했다.
뭐지? 바깥도 아니고, 영원정 안에서 이런 폭풍이 몰아치다니......
설마... 정원사가?!
"흐랴아아아아아아아!!"
촤아악-!
거센 폭풍이 나를 휩쓸고 지나가자, 뒤이어 정원사의 노성과 함께 거대한 검기가 나를 덮쳤다.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
검기를 피해내자, 이번엔 정원사가 직접 나에게 검을 휘둘러 왔다.
카앙-!
"뭐, 뭐야? 도데체 무슨..."
나를 두 동강 낼 기세로 날아든 검은 내가 반사적으로 교차시킨 총기에 가로막혔다.
그러나 검에 실린 힘은 조금도 줄지 않고 그대로 내 팔에 전해져 왔다.
말도 안 돼... 어떻게 이런 힘이 남아 있을 수가......
내가 경악하며 정원사를 바라보니, 정원사 또한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.
두 번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이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는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.
마치 나의 광기의 붉은 눈처럼.
분명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고 사부가 말한 적이 있었다.
그 때 분명 치료를 끝내어서 두 번 다시 눈이 붉게 물들 일은 없을 거라고 말씀하셨었는데......
설마 사부의 치료가 효력을 다한 건가?
콰지직-!
"아차!"
내가 정원사의 눈에 정신이 팔린 사이, 어디선가 또 다른 정원사가 내 손의 총기를 일검에 두 동강을 내버렸다.
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 상황에서, 어째서 정원사가 2명인가 하는 의문은 지금의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.
정원사를 가둬놓고 있던 탄막은 바람 앞의 낙엽마냥 쓸려나가 사라져버렸고, 정원사를 압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
총기마저 박살난 상황에서, 정원사와 마주하고 있는 건 자살행위다.
어떻게든 거리를 벌려야만 해!
"월안「월토원격최면술(텔레메스메리즘)」-!"
나는 재빨리 스펠카드를 꺼내 발동시켰다.
사부가 준 총기가 없어서 다소 화력이 떨어지지만, 그래도 시간벌기에는 충분할 것이다. 내 생각은 그랬다.
그러나-
"「대소반사위성참」!"
내가 스펠카드를 발동시킨 직후, 정원사 또한 뒤따라 스펠카드를 발동시켰고, 정원사의 스펠은 나의 마지막 스펠이 채 모습을
드러내기도 전에 나와 함께 격파해버렸다.
정원사의 스펠에 허무하게 격파당한 나는, 아래로 떨어져 가는 감각을 온 몸으로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....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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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걸로 달토끼 vs 정원사편은 끝.
다음 편부터는 카메라를 돌려서 방랑객이 날뛰는 모습을 중계(?)해 드립니다.